역사 인문
석양 석호산
게시 시간: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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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월담관광지삼림욕장의산비탈에는빙릉화곡잔도방향을따라금대여진귀족의고분유적지가있다.수원지를건설하기전에이곳은소허리역툰과가까웠고앞에는작은강이강을따라흘러갔다.무덤앞에는석양석호석인등석조가있어장기간사람들에게석양석호산으로불리웠다.이무덤은해방후발굴된적이없으며1982년석양석호산무덤은시급중점보호문물로지정되었다.


  고대에는줄곧무덤앞에석조를세우는습관이있었는데이런석조는"석상생"이라고도하는데한조가상대적으로서있는석상은무덤앞에하나의통로를형성하여신도라고한다.석양석호산고분은산꼭대기에서산아래로순서대로석인두존석양과석호각두마리가세워져있다.석인은일문일무이다.머리는모두잃어버렸다.몸의잔고는1.65미터이다.두루마기를입고좁은소매의라운드칼라허리띠를매고활모양도안을가지고있다.두손은홀을들고허리띠위에평평평평평하게들고발은부츠를신는다.그차림은중원송나라관원과비슷하다.석양의몸은엎드려누워있는상태이며몸길이는0.94m높이0.6m로키스부가약간잔인한것을제외한나머지부분은잘보존돼있다.석호가쪼그리고앉자앞다리와키스부는이미파손되였고높이는모두1.1메터였다.석조가서로마주서서중간에길이약35M너비약18M의신도가형성되였고부근에는파손된청벽돌과천문기와등이있었다.석조의조형풍격으로볼때서란금대완안희윤(김조초년중신여진문자의창제자)묘지의석각과상당히일치하며금대의장식장속및문화예술을체계적으로연구하는데중요한의의가있다.


  "송사·흉례"는여러신하들이"무덤의모든석양호망주각23품이상에석인두사람을상장한다"고규정하였다.금대는송제를모방하였기때문에이묘지의주인은생전에관작이3품이상이어야하고묘장규모는중형이상이어야한다고인정하였다.이무덤앞의석인복식은송나라사람들의스타일에가깝고중원문화의영향을많이받아여진민족의전통습관에서벗어났기때문에그시대는김대규모가중원에들어간후에금나라중기에있어야한다.


  20세기80년대이래성시문물주관부문고고학과학연구단위는여러차례조사연구를와서석양석호산고분과완안루실묘가정남정북방향에있으며한경선우에위치해있으며직선거리가10킬로메터이내이고그속에안장된것은완안루실휘하의3품이상의관원이여야한다고인정하였다.완안루실(1078-1130년)여진족완안부인김초명장대요작전에서전공이혁혁하고황룡부만호.루실이죽은후신왕으로추서되자김태종은직접수비대를파견하여루실의영구를호송하여고향즉제주동남쪽의오지리즉정월담동북쪽의비석령(정월구풍산촌유가로툰)에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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